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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원, 바둑계의 적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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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농심신라면배 사이버오로 착수 지연 사태

지난 8월, 제21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최종 라운드(3라운드) 경기가 있었습니다. 농심신라면배는 한국·중국·일본 3국 간의 국가대항전으로, 각국에서 다섯 명씩 총 15인의 프로기사가 출전하여 연승전 방식으로 총 3개의 라운드가 진행됩니다. 이 때 한 나라의 선수들만 남으면 최종 승리가 확정되므로 가장 적게는 10국, 많게는 14국까지 진행되는 독특한 진행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팀 리그' 시스템의 원조격이라고 볼 수 있지요. 2020년에는 코로나19 사태로 3라운드 일정이 3개월 넘게 밀리고 대회가 온라인 대국으로 진행되어 다소 아쉬움이 남는 리그가 되었습니다.

농심신라면배가 재미있는 가장 큰 이유는, 팀의 선수가 단 한 명만 남더라도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2004년 이창호 9단은 다른 모든 한국 기사들이 탈락한 상황에서 중국을 상대로 3승, 일본을 상대로 2승을 연달아 따내며 5연승으로 한국팀의 우승을 이끌어냈고,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상하이 대첩'으로 불리고 있지요.

2020년 펼쳐진 21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한국 프로기사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1라운드에서 원성진 9단이 1승을 챙긴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패배가 누적되며 한국 기사는 오직 박정환 9단만 남은 상황. 3라운드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중국과 일본은 각각 4명, 1명의 기사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일본의 유일한 생존 기사인 이야마 유타 9단마저 당시 연승가도를 달리던 중국의 양딩신 9단을 잡아내며 스퍼트를 올리고 있었기에, 한국의 우승 가능성은 너무나도 희박한 상황에서…

이 때 출전한 박정환 9단은 3라운드 시작과 동시에 기세등등하던 이야마 유타 9단을 잡아냈고, 이어서 중국의 미위팅 9단, 판팅위 9단, 셰얼하오 9단을 연달아 잡아내는데… 판팅위 9단과의 대국에서 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대국에 쓰이던 대국 프로그램 사이버오로에서 착수 지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박정환 9단이 착수 지점에 마우스 클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 오류로 착수는 되지 않고 초읽기 시간만 흐르다가 뜬금없이 박정환 9단의 시간패가 선언됩니다. 이 때 대국의 형세는 인공지능(katago) 분석 기준 박정환 9단의 승리 가능성이 96%로 계산되고 있었는데, 프로 바둑에서 종반(끝내기 단계)의 승리 가능성이 90% 이상인 경우 사실상 승부가 뒤집히는 경우가 없습니다. 대국 프로그램의 오류만 아니었다면 박정환 9단의 무난한 승리였던 상황인 것입니다.

중국 측에서는 판팅위 9단의 시간승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어찌됐건 프로그램은 판팅위 9단의 시간승을 선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9단이 제한 시간 안에 착점을 시도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그대로 녹화되었고, 정황 상 프로그램의 오류라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기원은 박정환 9단의 판정승을 쉽게 내리지 못합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재대국 판정이 내려졌고, 박정환 9단은 다 이긴 바둑을 처음부터 새로 두게 되어버렸습니다.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원래 매일 오후에 1국씩 잡혀있던 일정에서 추가로 1국의 일정이 생기자, 별다른 일정 조정 없이 기존의 일정에 1국을 더 끼워넣어버렸습니다. 8월 20일 치러진 대국이 무효가 된 상황에서 박정환 9단은 21일 오전에 판팅위 9단과 재대국을 펼쳐야 하고, 다시 승리하는 경우 당일 오후에 셰얼하오 9단과 또 기나긴 대국을 이어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 와중에 21일 펼쳐진 재대국에서도 13수만에 또다시 박정환 9단의 PC에 문제가 발생해 장비를 교체하는 해프닝이 발생하였고 전세계 바둑 팬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하루에 1국 일정이라고 해도, 대국이 시작되면 기사는 서너 시간동안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수읽기를 계속하며 승부의 호흡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자잘한 기술 오류는 대국자들에게 상당한 스트레스 요소인 것입니다. 특히 8월 21일 박정환 9단은 하루만에 3시간이 넘는 장고(長考) 대국을 두 개나 소화해내며 엄청난 체력 소모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최종 결승은 바로 그 다음날인 22일이었지요. 박정환 9단은 결국 판팅위 9단을 상대로 불계승, 셰얼하오 9단을 상대로 1집 반 승을 거두며 파죽지세를 이어갔고 5연승 같은 4연승으로 최종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마지막 상대인 커제 9단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면 사실상 2차 상하이 대첩을 만들어내며 최종 우승을 거머쥘 수 있는 상황에서, 결국 반 집 차이로 아쉽게 패배하고, 농심신라면배는 2회 연속 중국이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사이버오로가 문제다? 한국기원이 문제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다른 대회들을 살펴보면, 역시나 e스포츠 분야를 참고하게 됩니다. 가장 규모가 큰 e스포츠 종목인 LoL(리그 오브 레전드)의 경우 대회 전용 서버를 따로 두어 경기를 관리합니다.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에 대해 일반인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것입니다. 또, 혹시 모를 자연 재해 가능성 등을 염두에 두고 보조 전원 장치를 마련해두고 헤드셋과 마이크 등 바둑 리그보다 훨씬 많은 장비를 꼼꼼히 정비합니다. 그리고 경기가 이루어지는 내내 경기 부스에 심판이 상주하고 있고, 발생하는 이슈에 대해 즉각적인 대처가 이루어지며, 경기가 끝난 후에도 관련 데이터를 빠르게 저장해 중계진이 즉각 분석합니다.

사이버오로는 한국기원에서 만든 인터넷 바둑 대국 프로그램이고, 현재는 한국기원이 세계사이버기원㈜이라는 회사를 세워 운영하고 있습니다. 굳이 대회에서가 아니더라도 사용자들 사이에서 착수 지연 오류는 심심찮게 얘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으로 치러진 대회 또한 라이브 서버에서 진행이 되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문제가 터져나온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애초에 대회 전용 서버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상황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문제가 터져나온 이후에도 한국기원은 꾸준히 사이버오로 라이브 서버에서 온라인 대국을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기원이 사이버오로 시스템 오류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입니다.

 11월, 삼성화재배 마우스 미스 사태

11월 2일, 삼성화재배 월드마스터스 결승전이 열렸습니다. 월드마스터스는 말 그대로 전세계 프로바둑기사들이 도전하여 우승 상금 3억원을 두고 최고의 자리를 가리는 대규모 기전입니다. 그리고 최종 결승에서 한국 랭킹 1위 신진서 9단과 중국 랭킹 1위 커제 9단이 만났습니다. 3전 2선승제로 진행되는 결승의 1국에서,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신진서 9단이 21수만에 1선에 착점을 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둑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바둑판을 보더라도, 흑의 21수는 아예 뜬금없는 자리에 놓여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정도입니다.

결국 결승 1국은 120수만에 끝난 단명국(短命局)이 되었습니다. 당연히도 결과는 커제 9단의 승리로 돌아갔고, 이 상황은 '신진서 9단의 마우스 미스'로 모든 언론사에 보도되고 말았습니다.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image from cyberoro

image from cyberoro

대국 현장을 보면, 신진서 9단은 노트북 바로 옆에 외부 모니터가 연결되어 착점을 진행하고 있고, 마우스 선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매우 너저분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대국 중 이 마우스 선이 터치패드 부분을 건드려 착점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모니터를 두어 대국이 진행된다면 굳이 노트북이 필요할 이유도 없고, 설령 노트북이 세팅된다 하더라도 외부 모니터와 이렇게 가까이 세팅될 이유가 없는 데다가, 설령 가까운 곳에 세팅된다 하더라도 마우스를 사용하는 경우 터치패드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설정해두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프로 바둑 기사가 대국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한국기원 측에서는 이 모든 준비 과정을 대충대충 끝내버렸습니다. 그 결과 한국과 중국의 자존심을 겨루는 최종 결승에서 말도 안 되는 사태가 터진 것입니다. 게다가 외부로 연결된 모니터는 툭 치면 뒤로 넘어가 박살날 정도로 위태로운 자리에 세팅되어 있습니다. 착점 미스 사태가 아니더라도 문제가 발생할 요소는 여기저기 산재되어있습니다.

흑 21수를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커제 9단

반면 커제 9단의 대국 환경은 사뭇 다릅니다. 테이블도 널찍하고, 노트북은 저 멀리에 세팅된 데다가 선 정리도 깔끔해 장비 문제로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프로 기사가 오로지 대국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이 준비된 것입니다.

한국기원은 대국 당일 모든 언론사에서 해당 상황을 '신진서 9단의 마우스 미스'로 보도하는 동안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수 보호 차원에서 적극 해명하고 보도자료를 내야 하는 상황이 다 지나간 후, 2국이 진행되는 다음날이 되자 그제서야 입장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정정보도를 따로 낸 언론사는 없습니다.

한국기원은 선수들이 대국에 전념할 수 있도록 대국 환경을 철저히 관리해야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비대면 대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최대한 파악하여 대처했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이번 문제로 한ㆍ중 랭킹 1위 신진서 9단과 커제 9단의 세계대회 결승 맞대결을 기대하고 시청하셨을 바둑팬 여러분에게 실망을 안겨드린 점 깊이 사과 드립니다. 아울러 혼신의 힘을 다해 결승 대국을 준비했을 신진서 9단께도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삼성화재배는 수많은 바둑 스타를 배출하면서 25년 동안 세계 바둑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대회입니다. 이번 문제로 대회 명성에도 누를 끼쳐 후원사인 삼성화재에도 대단히 죄송한 마음입니다.

- 한국기원 '2020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1국 착점 오류에 관한 한국기원의 입장' 中

 9월, 김은지 2단 AI(인공지능) 치팅 사태

지난 9월 29일, ORO 국수전 24강전에서 김은지 2단은 이영구 9단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김은지 2단이 인공지능이 최적의 수라고 제시하는 수와 90% 이상 일치하는 수들을 두자 이 기보가 바둑 팬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10월부터는 본격적으로 AI 치팅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세계랭킹 1위급 신진서 9단·커제 9단도 인공지능 일치율이 85%를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은지 2단은 AI를 사용하지 않았다며 의혹을 부인하였고, 한국기원에서는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바둑 팬들 사이에서는 계속해서 논란이 일었지요. 관련한 현·전 프로기사들도 유튜브·SNS 등을 통해 본인의 의견을 밝히며 가세해 바둑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바둑TV, K바둑 유튜브 채널에서 생중계가 열리면 대국자가 누구든 너도나도 찾아와 김은지 2단 얘기를 하기 바빴을 정도입니다.

KataGo 데이터베이스에 해당 대국과 동일한 시간대에 동일한 기보가 등록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해당 대국이 진행되던 시점에 AI 데이터 베이스에 해당 대국과 동일한 대국이 기록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는 타오르던 의혹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물론 관전자가 대국을 AI로 분석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는 엄밀히 확실한 물증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정황 상 김은지 2단 측에 불리한 요소인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얼마 후 김은지 2단은 결국 대국 도중 AI의 참고도를 이용하였다는 취지로 한국기원 진상조사위원회에 진술하였고 프로 간의 대국에서 AI를 활용한 치팅이 일어났다는 의혹은 사실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김은지 2단의 사과문 전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은지입니다. 
이영구 사범님과의 온라인 대국 중에 이것저것 클릭해보다가 홈이 열렸는데 제 바둑이 나와서 아무 생각 없이 참고도를 보았습니다. 제가 너무 이기고 싶은 마음에 순간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그 후에 사범님들과 엄마가 물어보셨지만,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워서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제 잘못에 대해 정말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국대에서 평소에 저한테 너무 잘해주신 이영구 사범님께 정말 죄송합니다. 이영구 사범님은 오히려 저를 걱정하고 계신다는 엄마 말씀을 듣고 정말 더 죄송했습니다. 저를 많이 아껴주신 국대 감독님과 코치님 마음을 아프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큰 물의를 일으켜 프로기사 선배님들께도 정말 죄송합니다. 저를 여러가지로 도와주신 분들과 바둑 사이트 쪽지로 항상 응원해주신 분들께 실망시켜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바둑을 사랑하시는 바둑팬 분들께도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는 절대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제 잘못에 대해 주시는 벌을 받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 바둑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김은지가 되겠습니다. 

김은지 올림

문제는,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한국기원은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하였고 수많은 동료 프로기사들이 진상 규명, 공식 입장 표명 등을 요구하자 그제서야 실질적인 한국기원의 공식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치팅 대국이 일어난 것은 9월 말이며, 대국 직후부터 논란이 일기 시작해 10월 중 김은지 2단이 의혹을 시인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기원은 2차 조사를 11월 17일까지 마무리한 후, 20일에야 징계위원회를 열겠다는 공식 입장(소속기사의 인공지능 부정행위 의혹에 대한 한국기원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 기간 동안 김은지 2단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출전하는 기전들에서 예정된 모든 대국 일정을 소화하였으며 여기에는 상당한 규모의 중국 을조리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중국의 팀리그형 바둑 리그는 흔히 1군으로 불리는 '갑조리그'와 2군으로 불리는 '을조리그'가 있습니다. 상당한 대국료와 승리 수당, 그리고 명예가 걸려있어 전세계적으로 몸값이 높은 많은 프로기사들이 출전하고 있는 권위 있는 기전입니다.

AI 치팅으로 자격 정지 1년, 최선인가요?

결국 11월 20일 열린 징계위원회는 '전문기사는 공식기전을 포함한 각종 기전에서 조언과 담합을 엄금한다'는 소속 기사 내규 제3조 제2항 및 '훈수·고의패배·대리대국·개인전에서 2인 이상 연합대국·승부 담합 등 대국에서 금지 행위'에 관한 전문기사 윤리규정 제13조 제1호를 위반했다고 판단해 1년 간 프로 기사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또한 같은 날 열린 운영위원회에서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사용의 경우 자격 정지 3년 또는 제명의 징계가 내려질 수 있는 새로운 조항이 신설되었습니다.

해당 징계를 두고 다시금 네티즌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데, 처벌의 수위와 관련해 한국기원은 작금의 상황 내에서 최선의 결정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규정 내의 징계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명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경우 징계처분취소 건으로 법적 분쟁에 돌입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은지 2단은 2007년생으로 형법상 형사미성년자, 소년법 상 촉법소년에 해당하고 고소 및 형사처벌의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2020년 1월 발생한 입단 대회 AI 치팅 건([유튜브]프로연우:바둑프로 입단대회 AI부정행위 적발 했습니다 상세한 과정 알려드릴게요)과는 한국기원의 대응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2018년 홍성지 9단의 AI 치팅 관련 사과문

홍성지 9단의 경우 지난 2018년, 중국의 온라인 대국 서비스 '한큐바둑'에서 AI를 사용해 치팅을 하다가 적발되어 한큐바둑 서비스 내 프로기사 인증 마크가 취소되었고, 더이상 해당 서비스 내에서 프로기사 자격으로 바둑을 둘 수 없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큐바둑이 한국기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었던 데다, 프로 기전에서 발생한 치팅도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기원에서의 공식적인 징계는 없었습니다.

이미 여러 번 터진 논란, 왜 관련 규정이 없었나?

국내에서 사실 관계가 명확히 밝혀진 부분들만 살펴보았는데, 사실 국내·외를 통틀어 이미 2018년부터 많은 대국에서 AI 치팅 논란이 있었고, 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 대국이 활발히 진행되자 여러 대국에서 산발적으로 AI 치팅 관련한 의혹들이 쏟아져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기원은 관련 규정을 미리 만들어두지 않았는가? 이것이 이번 사건의 쟁점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상 나태한 한국기원의 입법부작위(立法不作爲)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상황이며, 이로 인해 다른 프로기사의 법익(法益)이 침해되었는지 여부를 가려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AI 치팅 의혹은 계속되어왔다. 위는 2018년 AI 치팅 관련 큰 논란이 일었던 대국 사진.

알파고(AlphaGo)가 혜성처럼 등장해 이세돌 9단과 대국을 치르고 4승 1패의 결과를 올린 것이 2016년 3월. 이미 4년 반 전의 일입니다. 이후 릴라(Leela), 절예(絶藝, FineArt), 한돌 등의 인공지능이 등장하며 계속해서 그 수준을 끌어올려왔고  카타고(KataGo) 등의 프로그램은 일반인도 쉽게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배포되어 왔습니다. 바둑을 아예 둘 줄 모르는 사람이라도 AI 프로그램만 켜두면 세계 랭킹 1위 프로 기사까지 단번에 박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총체적 난국, 한국기원

지난 수 개월 간의 몇 가지 사건에서 한국기원의 치명적인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세계 최정상을 다투는 프로 기사 간의 대국에서 어처구니 없는 세팅 미스가 연달아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장비·프로그램·제도 때문에 발생 가능한 문제 상황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 아예 없었다는 사실이 까발려진 것입니다.

결국 상기한 모든 사건들은 한국기원의 나태함이 부른 인재(人災)였습니다. 국내의 바둑 팬들 사이에서 한참 전부터 제기되던 문제들이 최근 국제기전 결승국들에서 줄줄이 엮이며 국제적인 망신으로 이어지니 바둑 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된 것입니다.

한국기원은 여전히 개별 사건에 대한 대응에 급급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혁신 의지를 표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시청자 입장에서 재미가 없어서라거나 사적인 안타까운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바둑계 전반에 대한 신뢰 하락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바둑, 제발, 살아있어줘

시대가 변하며 바둑 리그에 대한 스폰서가 이미 많이 줄어들었고 많은 국내외 기전들이 축소되거나 사라져가는 추세입니다. 여기에 AI 치팅은 사실상 승부 조작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e스포츠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묘하게 겹쳐지는 많은 사태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쇠락하던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대규모 승부조작 사태 직후 사실상 사라졌고, 게임을 업으로 하던 많은 프로게이머들의 미래가 불투명해졌습니다. 많은 e스포츠 팬들은 아직도 M 선수에 대한 분노를 잊지 못합니다. 이 분노는 단순히 한 게임을 좋아해서 또는 한 선수를 좋아해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함께했던 하나의 문화가 사라져버렸다는 데에 대한 상실감입니다.

저는 바둑에 재능이 없어 어릴적에 프로기사의 꿈을 접었고, 지금은 그저 한 명의 바둑 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화가, 제 인생의 일부가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AI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사들의 피땀 묻은 노력이 바둑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직도 주요 기전이 열릴 때면 만사를 제쳐두고 경기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막상 바둑계에 몸담고 계신 분들이 그만한 애정을 보이지 못하는 모습에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기원은 해당 김은지 2단의 징계 건과 관련해 단순히 그 근거를 밝히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해당 조항에 의거한 벌칙이 최대 어느 정도의 징계 수준까지 가능한지와 지금의 징계 수준이 실질적으로 최대 수준의 징계가 맞는지 아닌지를 명확히 밝혀야 하지요. 또한 불필요한 양형의 이유를 밝힐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재발 방지 대책을 밝혀 앞으로 프로 기전이 모두 공정하고 윤리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팅 가이드라인 등을 통해 신뢰 회복 절실

코로나19 사태가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되지 않을 경우 온라인 대국에서 각 대국자의 대국장에 심판을 2인 이상 파견하고, 대국 현장을 실시간으로 공유함과 동시에 녹화하여 추후 분석을 위해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심판은 AI 치팅 가능성이 없는 온라인 대국 전용 PC를 준비하여야 하고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기술적 오류에 대한 대비책(보조 PC 등) 또한 마련해야 합니다. 오프라인 대국에서는 금속 탐지기 및 전파 감지·방해 장치 등을 활용해 치팅 가능성을 원천 봉쇄할 뿐 아니라 대국 환경 또한 대국자가 온전히 대국에 집중할 수 있도록 테이블 및 모니터, 마우스 세팅을 완료하여야 합니다. 또한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전산 오류 상황에 대비한 대회 전용 서버 개설과 관리가 필요합니다.

이같은 세팅 가이드라인은 한국기원 내부 자료로 둘 뿐만 아니라 바둑을 사랑하는 모든 일반인이 접근하고 열람할 수 있게끔 투명하게 공개되고 수시로 업데이트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청자 입장에서도, 스폰서 입장에서도 바둑계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승부는 공정한 규칙과 당사자들의 윤리적인 마음가짐을 바탕에 두어야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이 모든 요소들이 모여 바둑계 전반의 신뢰와 직결됩니다. 신뢰라는 것은 쌓아올리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반면, 실수로 한 순간에 깨져버리면 돌이킬 수 없게 되기도 하지요. 이미 한국기원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게 되어 어떤 상황에서건 논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다시금 한국기원이 신뢰를 쌓아나가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부디 빠른 시일 내에 한국기원이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여주어 바둑계 전반에 대한 신뢰가 회복될 수 있도록 간절히 응원하고 또 응원합니다.

한편, 김은지 2단은 1년 간의 휴식기를 가진 후 바둑계에 복귀하더라도 평생 '치팅(cheating) 기사', '컨닝 기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을 거라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신뢰가 망가진 지금의 상황에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안을 가져올 수 없다면, 승부를 업으로 하는 프로기사보다 보급과 교육에 힘쓰는 프로기사의 길 또한 있으니 서로 좋은 쪽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발, 바둑이 살아있도록 노력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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