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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천천히 알아가기

[리뷰] 테넷(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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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닝타임 : 150분
  •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 출연 : 존 데이비드 워싱턴, 로버트 패틴슨(닐), 엘리자베스 데비키(캣) 등
한줄평 : ★★★★☆ '집대성'

아래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개봉 전 공개된 러닝타임부터 '이 작품은 놀란 감독이 작정하고 만든 영화'라는 느낌을 물씬 주었다. 놀란 감독의 대표작들인 메멘토(2000), 인셉션(2010), 인터스텔라(2014) 등의 가장 큰 특징은 '시공간의 왜곡'에 있다고 본다. 메멘토는 작중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별도로 시간을 왜곡하는 편집 기법을 극한으로 끌어올렸고, 인셉션은 순행적인 서사의 한 지점에서 여러 층으로 갈라지는 시공간의 왜곡을, 인터스텔라는 웜홀·블랙홀 등 우주의 구조물을 활용한 시공간의 왜곡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테넷은 예고편에서부터 시간이 왜곡되어 과거에 날아와 박힌 총알과 탄피가 현재에 회수되는 장면이 아주 인상깊었다.

테넷이 다루는 서사를 단순히 보면 한 CIA 요원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다루는데, 이는 전형적인 케이퍼 무비의 형태를 차용한 인셉션과 큰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인셉션은 '꿈'이라는 소재를 활용하였고, 테넷은 '인버전(Inversion)'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것이다.

이전의 작품 메멘토를 살펴보면 크게 순행과 역행, 두 갈래의 흐름으로 플롯이 진행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서사의 시작과 끝을 곧바로 보여준 이후, 각각이 서사의 중심부로 향해 가는 과정을 영화 전반에 걸쳐 보여준다. 테넷에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를 보여주지만 메멘토는 영화 한 편이 통째로 하나의 호흡으로 진행되는 반면, 테넷은 각 사건들이 반복해서 사건의 시작과 마무리가 중심부(테넷)를 향해 진행되는 호흡을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러닝타임 대비 상당히 빠른 호흡으로 서사가 전개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인버전'된 대상은 시간을 역행하는 흐름을 보여주는데, 대부분의 경우 작중 인물은 이 대상에 대해 전적인 통제 권한을 가지지 못한다. 이를 통해 플롯이 전개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의 왜곡을 다룬다고 하면 시간 여행을 통해 한 순간이 과거나 미래의 다른 순간과 곧바로 연결되는 형태(2020년에서 1990년으로, 혹은 2020년에서 2050년으로)를 떠올리지만, 테넷에서 다루는 시간의 왜곡은 다소 차이가 있다. '인버전'되는 순간부터 역행하기 시작하는 시간의 흐름이 핵심이다.

바로 이 '인버전'의 순간과 함께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상이 펼쳐진다. '인버전'된 대상은 한 시점에 존재하지 않거나, 다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버전이 한 번 일어났다면, 인버전 시점보다 과거의 시점에는 대상이 동시에 2개 존재할 수 있고, 이후 과거 시점에서 다시 인버전이 일어났다면 동시에 대상이 3개로 존재할 수 있다. 이는 인버전된 대상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다.

인셉션에서 놀란은 단순히 '꿈 속의 꿈'만을 구현하지 않는다. 더욱 복잡하고 화려한 플롯의 진행을 위해 '꿈(비 내리는 거리) 속의 꿈(호텔) 속의 꿈(설원), 그리고 그 속의 꿈(림보)'을 구현하고야 말았다. 하나의 시점에서 현실을 포함해 다섯 가지의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는 플롯은 충격 그 자체였고, 지금까지도 인셉션이 명작으로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테넷은 인셉션 이상으로 복잡하게 플롯을 전개한다. '테넷'의 소개와 함께 인버전된 사물이 등장하는데, 서사가 진행되면서 인버전의 대상은 사물에 국한되지 않고 사람까지 포함해버린다. 영화 초중반에는 '하나의 인버전'을, '인버전 대상의 관점'에서 진행하지만 이후 인버전의 갯수를 늘렸다가, 제 3자의 관점에서 인버전을 진행하기 위해 한 순간을 둘 이상의 관점으로 반복 진행하기도 한다. 한 가지 독창적인 소재를 가지고 끊임없이 변주를 이어나가며 스케일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이 상당히 복잡하므로 러닝타임이 길어질 수밖에 없고, 관객은 정말 제대로 집중해야만 이 과정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플롯의 전개에 따라 발생하는 사건의 규모와 양상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서사 전반에 대한 힌트를 던지는 과정은 메멘토, 인셉션에서의 연출 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프리포트(Freeport)에서의 보잉747 충돌 씬에서는 인터스텔라에서의 카메라 워킹이 언뜻 보이며, 영화 후반부에서 박진감 넘치게 펼쳐지는 작전 과정은 덩케르크를 떠올리게 한다. 앞서 이미 다룬 바와 같이 시공간의 왜곡을 다룬 메멘토, 인셉션 등의 영화는 테넷 전반에 걸쳐 옅은 그림자로 나타난다. 그간 놀란 감독의 작품들을 눈여겨 봐왔던 관객이라면, 이번 영화 테넷의 다채로운 연출이 마치 '놀란 종합 선물 세트'처럼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놀란 감독이 기존에 보여주었던 영화의 모습은, 참신한 소재와 고전적인 감성을 엮어나가는 방식이었다. 등장 인물의 감정선만을 놓고 봤을 때 메멘토는 주인공의 광기를 보여주었고, 인셉션은 주인공과 아내, 그리고 잃어버린 자식들을 두고 필사적으로 가족애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렸으며, 인터스텔라는 가족애와 인류애를 같이 엮어내었다. 테넷에서 보여주는 인물의 감정선 또한 비교적 단순한데, 이를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가 되겠다. 이는 집착하는 여인에게도, 인류 전체에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동시에 하나의 결말을 향해 플롯이 전개되는 근거가 된다. 하나의 감정이 서로 다른 대상에 투사되므로, 관객이 각각의 경우에서 발현되는 작중 인물의 행동과 그에 따른 주변 인물들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플롯이 비약되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다.

소재도, 구성도, 등장 인물의 갈등 양상도 놀란 감독이 이제까지 보여준 어떤 작품들보다 복잡해졌다. 나도 테넷은 두 번째 보면서 그제서야 이해된 부분이 많다. 요즘 '기출 변형'이라는 표현이 유행처럼 사용되는데, 놀란 감독의 이번 작품 테넷은 다양한 '기출 변형' 요소들을 활용하면서도 참신한 소재와 새로운 시도들로 150분이 꽉 채워진, 놀란 감독의 '집대성'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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