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의학의 발전은 진단과 치료의 많은 부분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국제질병분류(ICD,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의 내용에 한의학 상병명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한국표준질병 사인분류(KCD, Korean standard Classification of Disease and cause of death)를 통해 현대적인 진단에 변증(辨證)을 더하는 한의학 고유의 진단 체계가 인정되었으며, 국민건강보험에서는 전국민적 의료의 질 향상을 위해 약침·추나 등 다양한 한의학적 치료 방식을 받아들였지요. 그리고 한국·중국·일본을 필두로 기존의 침구 치료와 한약 치료를 결합하여 발전된 약침술은 그 재료 및 시술 방법에 있어서 계속해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다룰 '혈맥 약침'입니다.
주사제가 사용될 때는 ID(피내, Intradermal), SC(피하, subcutaneous), IM(근육내, Intramuscular), IV(혈관내, Intravenous)의 네 가지 경로 중 하나로 투여됩니다. 약침술은 한약재 등에서 추출·정제·분리 등의 과정을 거친 각종 성분을 약액으로 하여 인체에 주사하는 방식이므로 투여 경로의 차이가 없는데, 혈맥 약침은 이 중 IV 경로를 통해 빠르고 정확하게 전신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법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판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약침술은 2001년 국민건강보험법 상 요양급여 대상(100분의 100 본인부담 항목*)에 포함되었고, 이후 2006년 비급여* 항목으로 전환되었습니다.(건강보험 행위 급여 · 비급여 목록표 및 급여 상대가치점수'(보건복지부 고시 제2010-123호)) 그리고 이후에 대한한의학회에서 작성한 '한국표준한의의료행위 분류개정안'(2008)에는 약침술 대분류에 해당하는 소분류 항목에 분구약자술, 청맥약자술, 청근약자술, 혈맥약자술이 포함되었고, '비급여행위 항목별 분류체계 표준화 및 행위정의 개발연구(한방)'(2013)에는 비급여 항목인 약침술의 행위유형에 혈맥약침술(적응증: 응급질환, 급성 염증성 질환, 만성 소모성 질환, 대상: 혈맥, 청맥, 청근)이 기재되었습니다.
* 100/100 본인부담 항목은 급여에 해당하는 항목이나 공단 부담 없이 환자가 전액 본인 부담하는 항목입니다. 비급여 또한 환자가 전액 본인 부담하지만, 가격을 정하는 주체가 다릅니다. 비급여 항목은 각 의료기관에서 가격을 설정해 환자에게 고지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2013년 7월 다음의 내용과 같이 유권해석을 내린 것입니다.
▣ 정맥 혈관에 산삼 약물을 주사기로 투약하는 행위가 한의사의 의료행위인지 여부에 대하여
- 약침요법은 한의학 고유의 침구이론인 경락학설을 근거로 하여 한약에서 추출한 약침액을 압통점, 경락, 경헐점 등에 주입하여 한약과 침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요법으로 한의사가 행할 수 있는 한방 의료행위이며, 정맥혈관 등의 주사행위와는 학문적으로 구분된다.
- 아울러, 한의사가 한방원리에 의하지 않은 정맥에 주사하는 행위는 면허 범위 내의 의료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는 내용으로 유권해석을 한 적이 있다(2011. 4. 28., 한약정책과).
보건복지부 유권해석은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아니며 사법부 판결에서 뒤집히는 일도 많기 때문에 해당 유권해석 내용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법부 판결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결국 2015년 4월, 서울행정법원의 1심 판단이 공개되었습니다. 혈맥약침술은 약침술에서 발전한 치료법이지만, 약침술과 시술대상·시술량·원리 및 효능발생기전 등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약침술에 포함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혈맥약침술은 약침술에서 발전한 치료법이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판결문을 살펴보면 법원이 왜 혈맥약침술이 약침술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는지 그 근거가 명확히 밝혀져 있습니다.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 약침술을 요양급여대상에 포함하며 침술 급여 대상으로 15개 항목(경혈침술, 안와내 침술, 비강내 침술 등)을 지정한 이 사건 고시(보건복지부 고시 제2010-123호)에 따르면, 침술의 대상에 혈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 약침술은 경락론을 바탕으로 하는 침술을 전제로 약물요법을 가미하는 것으로, 침의 자극효과와 한약의 지속적인 치료효과를 동시에 얻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 그러나 혈맥약침술에서의 혈맥은 약제의 이동 통로로만 기능하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혈맥약침술은 약침술과 달리 침술에 의한 효과가 없거나 매우 미미하고 오로지 약물의 효과만이 극대화된 시술로 보인다.
- 혈맥약침술인 산삼약침은 한약적 원리로 추출한 모든 약물이 아닌 산양삼 등을 증류하여 추출한 약물에 한정하여 이를 경혈이 아닌 정맥에 주입하는 것이 치료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실험 결과를 토대로 개발되었고, 이는 통상 경혈 등 침을 놓는 부위에 약 침술을 시술하는 것에 대한 예외적인 치료방법으로 보인다.
따라서 약침술과 혈맥약침술은 시술 부위, 효능 발생 기전 등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고, 혈맥약침술이 이 사건 고시(보건복지부 고시 제2010-123호)에 등재된 약침술이 예정한 치료방법에 포함된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혈맥약침술과 약침술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된 이유는, 바로 신의료기술평가 절차 때문입니다. 신의료기술평가는 2007년에 새로운 의료 기술의 안전성 및 임상적 유용성을 평가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로, 새로운 의료 기술에 대하여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의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가 안전성과 유효성을 심의한 후 국민건강보험에서 인정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 심의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데이터는 바로 체계적 문헌고찰(Systematic Review) 결과입니다. 즉, 어떤 의료인이든 신의료기술평가보다 앞서나가는 '오버 얼리어답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53조(신의료기술의 평가) ①보건복지부장관은 국민건강을 보호하고 의료기술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제54조에 따른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신의료기술의 안전성ㆍ유효성 등에 관한 평가를 하여야 한다. <개정 2008. 2. 29., 2010. 1. 18.>
②제1항에 따른 신의료기술은 새로 개발된 의료기술로서 보건복지부장관이 안전성ㆍ유효성을 평가할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개정 2008. 2. 29., 2010. 1. 18.>
이는 다시 말해 충분한 임상 경험과 근거가 확보된 치료법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국민건강보험에서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제도이기도 하나, 실질적으로 임상 현장에서 그 가치보다는 부작용이 크게 느껴진다는 의견이 많은 제도입니다. 새로운 의료 기술을 개발하였을 때, EBM을 전제로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증례(Case) 및 증례군(Case Series)부터 시작하는 임상 경험의 축적이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을 원천 차단한다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혈맥약침술이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는 데다 수액 제제까지도 중의(中醫) 의료의 범주에서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근거 수준이 마련되는 것은 사실상 시간 문제로 이해되는 상황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번 건과 같이 정책과 제도의 한계로 한의학의 발전에 끊임없이 제동이 걸린다면, 국가적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중국의 중의학과 좁힐 수 없는 격차가 벌어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네요. 신의료기술평가 제도의 한계를 넘어 국민의 건강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의료기술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발·수용할 수 있는, 그런 제도가 도입될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위 글은 법학 전공자가 제공하는 전문 지식이 아닙니다.
전문적인 법률 지식은 변호사에게 의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