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기묘묘하다. 반상(盤上)에 놓인 돌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
바둑은 조금만 배워도 기풍(氣風)이 생긴다. 단단한 세력을 쌓아 힘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기풍, 차곡차곡 실리를 쌓아 교묘히 승리만을 취하고자 하는 기풍, 여기저기 곳곳에 난전을 만들며 판 전체를 뒤흔들어놓는 기풍, 여기저기서 겉멋만 들어 허세 가득한 기풍 등등등등등.
얼굴을 가리고 바둑을 두어도 맞둔 적 있는 사람은 안다. 한 수 한 수에 그 사람의 성향과 성격이 드러난다. 판이 끝날 듯 격렬하게 맞붙는 순간에도 극적인 타협책을 찾아 끝까지 바둑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번 시작한 사소한 싸움으로 끝을 본다며 매 대국(對局)마다 밥 먹듯 대마(大馬) 수상전(手相戰)을 벌이는 사람도 있다.
어릴 적에, 바둑을 한창 배우던 시절에, 매일 열 시간 넘게 바둑학원에 자리를 깔고 앉아 몇 국(局)이고 바둑을 두고 있으면 사범님께서 옆에서 슬쩍 슬쩍 국면(局面)을 살펴보시고는 도돌이표처럼 같은 말씀을 하셨었다.
바쁘다. 발빠른 바둑은 좋지만 허겁지겁 바쁜 바둑은 좋은 바둑이 아니다. 바쁘면 느슨해지고, 느슨해지면 힘이 없다. 여기저기 재미는 다 보고 정작 바둑을 진다. 급하다. 마음이 급하니 손이 급해진다. 손이 급하면 반드시 그르친다. 실리바둑이든 세력바둑이든 한 국(局)에 한 번은 맞붙는 것이 바둑인데, 힘이 없으니 싸우지를 못한다. 정작 힘을 내야할 시점에 주도권을 놓치는 것이다.
가끔 생각이 급해 손이 경솔히 나갈 때면, 사범님은 내게 한 수를 둘 때마다 꼭 팔짱을 끼라고 잔소리하셨다. 한 손에 바둑돌을 쥐고 있다가 상대방의 착점(着點)과 동시에 착수(着手)하는 것보다야 팔짱을 풀고 바둑돌을 손에 올리는 1초라도 생각을 더 하고 두라는 뜻이었다. 신기하게도, 팔짱을 끼고 바둑을 두자 급수가 순식간에 네 단계 올라갔었다.
포석이 마무리될 즈음 국면을 빠르게 훑는다. 주먹구구 계가(計家)도 한 번 해보고, 요석(要石)과 폐석(廢石)을 다시 나눠보고, 천천히 팔짱을 낀다.
당장에야 폐석처럼 보이는 돌도 상대가 예상 못한 시점에 움직여 나오면서 뒷맛을 노려볼 수 있고, 요석으로 보이는 돌도 자체로 움직이기보다 빠르게 사석(死石) 작전으로 이어나가는 편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적진에 뛰어들 때는 침투(浸透)와 삭감(削減) 중 무엇을 택할지 고민해야 한다. 무리한 침투는 상대의 경쾌하고 통렬한 행마(行馬)를 돋보이게 할 뿐이고, 소심한 삭감은 불리한 국면을 뒤집어놓기에 부족할 수 있다. 기분으로 바둑을 두면 그르친다. 기분 좋게 두 점 머리 두들기려다가 절호점(絶好點)을 놓치는 수가 있다. 우하귀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승패가 저 멀리 반대편 좌상귀의 배석(排石)에 달려있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이다. 이전에 잘못 둔 수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결국 승부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잘못 두어진 수가 있더라도 이기면 완착(緩着) 내지 실착(失着)이 될 뿐이나, 판을 지면 패착(敗着)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바둑이 그렇다. 돌이 놓인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는대로 두어야 이긴다.
그렇게 그렇다. 바둑이 그렇다. 참 기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