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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18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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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짬이 나면 CPU와 바둑을 둔다. 프로그램마다 실력이 다른데, 모바일로는 엎치락뒤치락할 때가 있지만, PC로는 아무리 필사적으로 두어도 가장 쉬운 난이도를 이길 수가 없다. 잘 두고 싶어서, 복기를 한다. 복기를 하면 PC는 친절히도 매 상황의 최적의 수를 찾아 나에게 조언을 해주곤 했다. 어느샌가 나는 매 판을 둘 때마다, 매 수를 둘 때마다 PC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묻고, 조언을 얻게 되었다. 무리한 공격이 아니라 견실하게 지켜야했구나. 너무 수비적이기보다는 응수타진을 해봤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나는 PC처럼 생각하고, PC처럼 두기를 바라왔다. 문득, 한 판을 다 두고 복기를 해보려는데 판이 영 재미가 없다. 치열하게 싸웠고 매 순간 살얼음판같은 스릴이 넘쳤을 법도 한데, 매력이 없다. 기계같은 바둑. 나는 나를 얼마나 잃어왔을까. 나는 분명 전보다 미세한 차이로 지고 있었고, 전보다 수읽기도 늘었지만 그 뿐인 건 아닐까. 이게 내 바둑이라고, 누군가에게 기보를 보이며 전보다 잘 사는 게 아니냐고 떳떳하게 물을 수 있을까. 미세한 패에서 팻감 하나를 삐끗해 풍비박산이 나는 판이라도, 어쩌면 그게 재미있는 바둑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 어쩌면 나는 생각 없이 살아가기 위해 정답지를 찾아 컨닝하고 싶어하는, 멋없는 사람으로 크고 있는 건 아닐까. 아집이 아니라면, 나도 내 감각으로 한 수씩 두어나가는 것이 때론 매력적이지 않을까. 나의 기보가, 온전히 나의 기보이기 위해 나는 나일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이 멋있다. 차분히 수를 읽고 판을 짜나가는 사람. 멋있고 싶다는 생각에 매몰되면 멋없는 사람이 되고야 만다. 재미없는 바둑은 멋이 없다. 재미있는 바둑이, 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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